몇 년 전 이야기다. 내가 한참을 애니에 빠져살 때다. 마침 간만에 나온 애니 동영상을 구했는데 자막이 없었다. 구글에 가서 검색하다보니 어떤 노인(?)의 웹사이트가 보였다. 자막을 만들고 있다고 하니 댓글을 달았다.

"좀 빨리 만들어주면 안 됩니까?"

했더니

"자막 갖고 재촉하겠소? 급하면 다른 사람 거 보시우"

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. 알았으니 잘만 만들어달라고만 했다. 그는 잠자코 열심히 대본부터 만들었다. 처음에는 빨리 만드는 것 같더니, 저물도록 똑같은 의미의 대사를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고 굼뜨기 시작하더니, 마냥 늑장이다.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, 자꾸만 또 고치고 있다.
베타라도 좋으니 그냥 내놓으라고 해도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. 곧 토요일이 끝날 것 같다.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.

"그만해도 좋으니 된 거라도 일단 주십시오"

라고 했더니, 화를 버럭 내며,

"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,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."

한다. 나도 기가 막혀서,

"볼 사람이 좋다는 데 뭘 더 손본단 말이오. 이러다 주말이 다 가겠다니까요"

노인은 퉁명스럽게

"다른 사람 거 보쇼. 난 안 만들겠소"

하고 내뱉는다. 지금까지 기다린 게 아깝고 주말은 이미 날아간 것 같아서,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.

"그럼, 마음대로 만들어 보시오"

"글쎄, 재촉을 하면 오타에 오역이 많아진다니까. 자막은 제대로 만들어야지. 만들다 공개하면 되나"

좀 누그러진 말씨다. 이번에는 자막 작업을 숫제 그만두고 태연스럽게 게임 리뷰가 올라온다. 기다리는 사람은 목이 빠지는데 그 시간에 게임을 한 모양이다. 나도 그만 지쳐 버려 포기하고 말았다. 얼마 후에야 자막을 Zip으로 묶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. 사실 아까부터 다 된 자막이다.
자막을 기다리다 주말을 날린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. "그 따위로 자막질을 해서야 누가 보겠나. 볼 사람이 아니라 제 본위다. 그래 가지고 수정한다고 하면 까탈스럽다. 지 잘난 줄 알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."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. 자막을 하드에 저장하고 보니, 이 많은 대사를 전부 듣고 적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. 내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.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.
그 후로 몇 년이 지나 저녁에 친구와 소일거리를 찾던 중에 그 애니가 생각났다. 함께 감상하니 자막이 괜찮다고 한다. 그러나 나는 다른 자막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. 그런데 친구의 설명을 들어보니 유행어, 비속어를 쓰면 시간이 지나 재감상할 때 거슬리고, 들리는 대로 받아 적은 자막은 일어 어순에 익숙하게 만들어 국어를 파괴하게 된단다.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.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. 참으로 미안했다.
나는 다시 그 노인의 웹사이트를 찾아가 댓글이라도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. 그래서 감상이 끝나고 바로 브라우저를 열었다. 그러나 그 노인의 웹사이트는 전에 비해 황량하게 변했다. 최근 자막이 작년에 나온 OVA를 한 달에 한 편씩 만드는 게 다였다. 애 아빠가 된 데다 게임은 아직도 하는 모양이다.
내 입에서 무심히 싯구가 새어 나왔다.

"昧加勿 氣根理 亞水萬乙 唜離朱氣嫩球拏"
(매가물 기근이 아수만을 말리주기눈구나)

"先螺利主 那破書"
(선라이주 나파서)


...

4월 신작도 전부 패스~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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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1. U.P 2010.03.05 22:10 신고

    방망이라도 하나 깎아서 선라이즈를 때려부수는 건 어떤가요? 후훗 적절한 풍자

    • 아쓰맨 2010.03.07 01:26 신고

      그건 유니콘 완결된 다음에 생각해보죠.
      일단 유니콘은 땡큐베리감사. ^^

  2. Favicon of http://djpatrick.pe.kr DJ.Patrick 2010.03.05 22:10 신고

    아마 3사분기도 패스를 하셔야 할듯... 4사분기 될 때쯤 해서 유니콘 2화랑 더블오 극장판이 나오니
    아마 9월까지느 자막작업 휴무가 될 듯 싶네요 ~_~

    이참에 애플관련 포스팅을...?

    • 아쓰맨 2010.03.07 01:28 신고

      도대체 이 암흑기는 언제까지 이어질지...
      정말 이러다 "교토 쇼크"로 아니메가 망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.
     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임팩트있는 작품 몇 개면 순식간에 주도권이 넘어올 듯한 분위기네요.

  3. Favicon of http://terminee.tistory.com Terminee 2010.03.06 00:25 신고

    참 적절하군요. 좋은 원작에 좋은 각색... 크크
    선라이즈 나빴어...에 한표.

    • 아쓰맨 2010.03.07 01:30 신고

      선라이즈도 문제지만 망해버린 곤조는 더 문제네요.
      쪼그라든 가이낙스도 문제, 제벡은 언제까지 버틸지...
      몇년 지나면 메카닉 디자이너 직군이 사라질지도;;

  4. 라꾸 2010.03.06 01:45 신고

    끅읍으흐흐흐~! 이렇게 감동적인 글은 씨디굽는노인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효~
    얼굴근육 마비되게 웃었담니다. 끅끅끅~
    자막보다 글짓기에 소질있으신 듯~ ^^

  5. Favicon of http://einz.kr 아인 2010.03.06 05:55 신고

    풉... 마지막이 압권이네유 -3-
    그러고보면 요새는 정말 정통 메카 같은 건 보기 힘든듯;

    • 아쓰맨 2010.03.07 01:33 신고

      보기 힘든 게 아니라 없죠.
      TV로는 강철의 라인배럴이 마지막 아닌가요?
      그게 2008년작이네요.

  6. Favicon of http://blogand.net 두리뭉 2010.03.06 08:55 신고

    아아, 너무 적절한 포스팅이군요. 아침부터 크게 웃어봅니다.

    • 아쓰맨 2010.03.07 01:34 신고

      쓸 때는 웃기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
      의외로 반응이 뜨겁네요;;

  7. Favicon of http://paradaim.egloos.com THE빅오 2010.03.06 14:30 신고

    이걸로 아쓰맨님이 손 볼 작품(아마)는
    더블오 극장판(1년뒤...)과 마크로스 F 극장판(고작하면 6~9월) 유니콩 2화(9월일듯)
    그리고 브레이크 블레이드라는 작품일거 같습니다.
    경제난으로 인해 요즘 애니 회사들은 파는 걸 더 목적으로 두더군요.
    덕분에 어린 아이 성인 만화 그리면 잡는다 라는 제도도 만들어지고...

    • 아쓰맨 2010.03.07 01:41 신고

      그렇죠. 극장판과 OVA 밖에 없어요.
      일본이 계속 이렇게 무턱대로 미소녀물만 만들다가는
      뽀로로와 빼곰의 후예한테 역습당할지도. 훗

  8. barton 2010.03.09 00:26 신고

    자막 깍는 아쓰맨님 ㅋ. 여전히 멋진 작품만을 선별해 번역해주시는군요!

    • 아쓰맨 2010.03.11 10:36 신고

      오랜만이네요 ^^

      전에는 몇 개 놓고 골랐는데
      요즘에는 한 개도 없으니 선별이라고 해도 될까요?

      슬슬 이 블로그 테마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.

  9. Favicon of http://atorie.pe.kr J.D.S. 2010.03.12 00:53 신고

    쿨럭; '재촉한다고 자막이 나오나? 다듬을대로 다듬어야 자막이 나오지-' ...는
    저도 친구들에게 자주 써먹는 변명거리인데, 이만큼 다듬어진 자막 깎는 노인 떡밥은 처음이네요 =ㅂ=;;;

    덕분에 간만에 유쾌하게 웃습니다 ^^

    • 아쓰맨 2010.03.12 10:25 신고

      오호. JDS님까지 낚았군요.
      이거 월척인데요. 후후훗

  10. scopedog 2010.03.12 22:17 신고

    보톰즈를 검색하다가 자막 깍는 주인장 님까지 오게 된 사람입니다. 작업량을 보니 가히 놀랍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.
    저는 요즘 컴퓨터를 오직 음악감상하는 데만 쓰는 폐인입니다. 애니는 물론이고 요즘은 영상매체에 제 기호에 맞는 것들이 없어서 집 앞에서 오는 동네 이동도서관 차량의 책으로 제 문화적인(?) 욕구를 충족하고 있습니다. 그런 제가 요즘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영상물은 그나마 보톰즈 시리즈랄까요. 인지도가 적어서 존재 자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보톰즈 같은 작품도 자막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. 처음 블로그에 들어와서 좀 건방진 질문을 감히 드리오니 혹시 이번에 나오는 키리코 연대기(?)의 마지막 작품 환영편의 자막도 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? 인터넷을 떠돌면서 눈팅만 하는 유령이 감히 질문드립니다.

    • 아쓰맨 2010.03.20 19:22 신고

      3월 26일에 DVD가 나오는 것 같더군요.
      특별한 이변이 없으면 작업할 것 같네요 ^^;

  11. 아이고 자막좀 2010.03.19 21:07 신고

    메카물 기근이 아쓰맨을 말려죽이는구나
    선라이즈 나빠써

    아이고 자막좀 굽신~굽신~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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